신학국 소식
김은철 목사
총회 신학국장
아가페순복음교회
영국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 신학박사(PhD)
신약의 최초의 교회 : 오순절교회(행 2:1-47)
서언
오순절날에 일어난 사건은 신약의 최초의 교회의 설립인가? 그리고 이 교회는 오순절교회인가? 이 질문에 대한 논의는 아직 신약학계에서 다룬 적이 없었던 것이므로 신약학도들에게 새로운 관심을 갖게 하며, 특히 오순절신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이슈가 된다. 이 중요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 먼저 교회의 원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누가가 정의하는 교회가 무엇인지 사도행전 전체에서 알아 본다. 그리고 나서 교회의 원래의 의미가 누가의 교회관에 올바로 이해되었는지 살펴본다. 그 다음 오순절에 일어난 사건이 신약의 최초의 교회를 설립한 것인지에 대해 논의를 하고, 그리고 이 교회는 오순절교회인지를 논의한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관심사인 오순절교회의 정체성을 알아본다.
1. 누가가 말하는 사도행전의 교회
신약에서 사용하는 에클레시아(ekklesia)의 원래의 의미는 무엇인가? 에클레시아는 구약의 히브리어 카할(qahal)과 동등한 의미로 번역된 말로써 "총회"(assembly)란 뜻이다. 이 총회(카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기 위해 시내산에서 처음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야웨의 총회"(Assembly of Yahweh)란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 그 구성원이란 의미로 나타난다. 칠십인역은 에클레시아를 사용하여 히브리어 카할의 의미를 이어 왔으며, 코이네 헬라어신약은 에클레시아를 "하나님의 총회"(Assembly of God)란 뜻으로 사용했다.
그럼 누가가 말하는 교회는 무슨 교회인가? 사도행전에 에클레시아란 단어가 17번 나오는데 이것을 정리하여 교회를 정의하여 본다.
(1) 5장11절에 쓰여진 교회는 "성령이 임재한 교회"를 말한다. 이 구절에 관련된 문맥을 보면, 성령을기만하는 사건으로 성령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두려움에 있는 회중을 교회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이 에클레시아는 성령의 임재로 인하여 압도된 회중을 의미한다. 그전에 두 번의 성령의 임재, 즉 오순절날의 성령의 임재와 사도들의 모임 위에 성령의 임재가 있었다.
(2) 8장1절과 13장1절에서 쓰여진 교회는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세운 "지역교회"를 말한다. 이 구절에 언급한 "예루살렘교회"는 지역적인 장소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오순절날에 성령충만하게 된 사람들이 복음전도하여 예루살렘 지역에 수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고,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안디옥교회"도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어 안디옥이라는 지역적인 장소에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이룬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14장23절에 쓰여진 "각 교회", 16장5절에 쓰여진 "교회들"도 특정한 여러 지역에서 성령의 사람들로 인해 그리스도인의공동체를 이룬 것을 말한다.
(3) 8장3절과 12장1절에 쓰여진 교회는 "핍박받는 교회"를 말한다. 예루살렘교회가 사울의 박해로 고난을 받았다. 사도외에 제자들은 흩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스데반은 순교했다. 헤롯 왕은 교회를 핍박하였고 야고보는 순교했다. 베드로는 옥에 갇혀 쇠고랑을 찼다.
(4) 12장5절에 쓰여진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를 말한다. 예루살렘교회는 핍박을 받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 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으며, 베드로는 천사에 의해 자유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교회로 가서 자초지종을 말했다.
(5) 9장31절에 쓰여진 교회는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세운 "지방교회"를 말한다. 누가는 세 지방의 전 지역,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에 여러 교회가 세워졌다고 한다. 헬라어신약에서 본 구절의 교회를 단수 혹은 복수로 사용한 사본에 따라 약간의 해석의 차이가 있다. 웨스트코트허트 신약(Westcott-hort New Testament)의 본문에 따르면 에클레시아(단수)로 사용되었고, 스테파너스 신약(Stephanus New Testament)의 본문에 따르면 에클레시아이(복수)로 사용되었다. 단수로써의 교회는 여러 교회들이 하나의 유기체라는 의미로 또는 여러 교회들이 서로 연합된 하나의 지방회로 볼 수 있다. 복수로써의 교회는 교회들이 국내적으로 세워졌다는 것이다. 복음전도를 통해 팔레스틴의 전 지역에 교회가 세워졌으므로 국내 복음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6) 11장22절과 13장1절에 쓰여진 교회는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선교하는 교회"를 말한다. 예루살렘교회는 성령충만한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내어 전도했다. 바나바는 다소에 있는 바울을 데리고 와서 안디옥에서 일 년간 협력목회를 하여 안디옥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는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처음으로 부르기 시작한 곳이다. 그리고 안디옥교회는 성장하여 선교의 비전을 나누었다. 교회의 구성원들인 선지자들과 교사들 그리고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복음전도에 대해 금식기도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령의 지시대로 안디옥교회는 성령충만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임명하여 보냈다.
(7) 15장22절에 쓰여진 교회는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모여 선교전략을 모색하는 "선교총회하는 교회"를 말한다. 예루살렘교회는 종교회의에서 이방선교에 관한 논제를 결의한 후 사도들과 장로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전략가로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에 모든 회중은 이 회의를 전적으로 동의하고 협력하고 깊은 관심을 가졌다. 누가는 이 모임을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로 사용했다. 이 단어의 가장 좋은 번역은 아마도 회중보다는 총회이다. 즉, "조직적인 구성원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 모인 모임"인 것이다. 이 모임은 이방인 선교사업의 계획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선교전략총회이다.
(8) 20장28절에 쓰여진 교회는 성령이 운영하시는 "하나님의 교회"(Assembly of God)를 말한다. 하나님의 교회라고 명명한 것은 교회는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말한다. 지역적인 장소를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모든 교회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뜻이다. 누가의 교회관의 중요한 관심은 바로 성령인데, 성령이 하나님의 교회의 운영자라고 말한다.
그럼 위와 같이 언급한 누가의 교회관은 원래의 의미로, 즉 야웨의 총회(qahal)라는 의미로 충실하게 사용되였는가? 시내산에서 나타난 야웨의 총회를 살펴보면(출 24:12-18; 신 5:22; 9:10; 10:4; 18;16, 민 16:3 20:4), (1) 하나님의 임재, (2) 하나님의 임재가 이스라엘을 운영하시는 모습, (3) 모세가 시내산 총회를 이끄는 모습, (4) 모세의 기도하는 모습이 있다. 누가는 이 모습을 7장38절에서 "광야교회"라고 언급했다. 이 독특한 언어는 교회의 예표론적인 언어로 표현되었는데, 구약의 카알(qahal)과 신약의 에클레시아(ekklesia)를 연결하는 매개체적인 역할의 의미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광야교회를 누가의 교회관과 대조해 보면 일치된 모습을 보여준다: (1)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임재, (2) 하나님의 임재가 이스라엘을 운영하시는 모습과 성령이 하나님의 교회를 운영하시는 모습, (3) 모세가 시내산 광야라는 지역교회를 세운 것과 성령충만한 사도들이 지역 교회를 세운 것, (4) 모세의 기도하는 모습과 교회의 기도하는 모습. 하지만 누가는 원래의 의미에서 좀 더 발전된 교회관을 보여준다. 교회의 모습이 성령의 임재로 새롭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주변의 지역들에게 전도하는 교회를 말한다. 반면에 광야교회는 광야에서 머물렀고 광야에서 방황하며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또한 누가가 말하는 교회는 지경을 넘어서 선교하는 교회, 선교전략을 논의하는 교회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2. 오순절날에 일어난 사건(행 2:1-42): 교회의 설립
오순절날에 일어난 사건을 교회의 설립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문맥 안에서는 교회라는 단어가 없는데 어떻게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가? 세 가지로 논의한다.
첫째, 오순절날에 일어난 사건은 교회의 원래의 의미인 야웨의 총회(qahal)와 일치한다. 시내산에서 일어난 사건에는 (1) 하나님의 임재, (2) 하나님의 임재가 이스라엘을 운영하시는 모습, (3) 모세가 시내산 총회를 이끄는 모습, (4) 모세의 기도하는 모습이 있다. 오순절날에 일어난 사건에는 (1) 성령의 임재, (2) 성령의 임재가 교회를 운영하시는 모습, (3) 베드로가 오순절날에 모인 무리에게 설교하는 모습, (4) 베드로와 사도들의 기도하는 모습이 있다.
둘째, 오순절날에 일어난 사건은 누가의 교회관(ekklesia)과 일치한다. 오순절날에 일어난 사건에는 (1) 베드로와 제자들이 함께 기도하는 모습, (2) 성령의 임재, (3) 성령충만한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임, (4) 성령의 임재가 제자들을 운영하는 모습, (5) 성령충만한 사람들의 복음전도, (6) 성령충만한 사람들의 선교가 있다. 누가의 교회관은 (1) 기도하는 교회, (2) 성령이 임재한 교회, (3)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세운 지역교회, (4) 성령이 운영하시는 교회, (5) 성령충만한 사람들의 복음전도로 세운 지방교회, (6)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선교하는 교회이다.
셋째, 오순절날의 공동체의 모습을 마태복음에서 예언한 교회의 모습과 연결된다.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열두제자들의 지도하에 교회가 세워질 것이라고 말한 예언(마 16:18)이 오순절날에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열두제자들의 활동으로 예수를 증언하는 교회의 모습(행 2:14)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성령의 세례를 주실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대로 성령이 모인 무리들에게 임하신 후에 이루어진 것이다(행 1:5). 누가는 오순절날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한다. 학자들은 오순절날에 세워진 교회는 완전한 교회의 모습이라고 한다. 비록 하루만에 세워진 교회이지만 지난 삼년간 예수께서 사역하신 결과로 나타난 교회이다.
3. 오순절날에 세워진 교회: 신약의 최초의 교회
오순절날에 일어난 사건이 교회의 설립이었다면, 이 교회는 신약의 최초의 교회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먼저 세 가지 다른 견해에 대해 논쟁해야 한다. 첫째, 부활전의 열두제자들을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 만일 부활전의 열두제자들을 교회라고 한다면 오순절교회는 최초의 교회가 될 수 없다. 둘째, 부활후의 제자들이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제자들의 공동체, 즉 마가의 공동체, 마태의 공동체, 요한의 공동체가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누가는 어떻게 답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이기 때문에 마가복음, 마태복음, 요한복음의 저자들보다 더 넓은 역사를 안다. 마가복음, 마태복음, 요한복음의 저자들은 부활전후를 알지만 오순절날과 그 후는 전혀 모른다. 그러나 누가는 부활전후 뿐만 아니라 오순절후와 그 후 초대교회의 전 역사를 잘 인지하고 있다.
(1) 부활전의 열두제자들이 교회인가? 부활전의 열두제자들이 교회라고 주장하는 그룹이 있다. 마우라이스 고구엘(Maurice Goguel), 루돌프 쉬나켄부르크(Rudolf Schnackenburg) 그리고 한스 콘젤만(Hans Conzelmann)은 열두제자들의 공동체가 이미 교회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열두제자들은 자신들이 교회라는 의식을 가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열두제자가 교회인가에 대한 논제의 해결은 에클레시아의 의미와 일치되는 모임인지를 살펴봐야한다.
부활전의 열두제자들의 모임은 누가의 여덟가지의 교회관에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부활전의 열두제자들의 모임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첫째, 열두제자들은 믿음이 없었다. 열두제자들이 자신들을 교회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면, 그리고그들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교회의 기초라고 생각했다면, 예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야한다. 그렇지만 세복음서 저자 중 마가는 제자들에 대해 부정적이며 불신앙적인 그들의 모습을 가장 솔직하게 묘사한다. 마가복음은 제자들의 믿음이 약한 모습에 초점 맞춰 묘사했다. 마가는 제자들의 믿음생활이 실패였다고 말한다.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마가복음, 마태복음, 요한복음의 저자들은 특히 예수의 수난과정에서 제자들의 행동이 실망스럽다고 표현한다.
둘째, 열두제자들간에 경쟁심이 있었다. 열두제자들은 서로 누가 큰 가를 논쟁하면서 여러 번 자리다툼을 했다고 말한다(막 9:34; 눅9:46; 22:24). 뿐만 아니라, 형제인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의 측근의 위치를 구하자 제자들은 분노하였고(막 10:35-37), 그들의 어머니가 찾아와 예수께 자리부탁 할 때도 제자들은 분노했다(마 20:20-21). 심지어 예수님과의 마지막 만찬을 하는 중에서도 누가 크냐고 논쟁하면서 타툼이 일어났다(눅 22:24). 이런 분위기의 모임에서 가롯 유다는 스승을 파는 배반행위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가롯 유다는 돈을 탐했으며 다른 제자들은 자리를 탐했다.
셋째, 열두제자들은 영적인 깨달음이 부족했다.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베드로와 다른 열 한제자들은 예수가 생명의 주이신지도 깨닫지 못했다(막 8:13-21).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 칠병의 기적을 체험하고도 떡 한조각 밖에 없음을 걱정했다. 열두제자들은 예수의 죽으심에 대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베드로는 예수의 죽으심에 대해 부정적인 말로 만류하여 엄청난 책망을 들었다(막 8:33). 변화산상에서 영광 가운데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의 죽으심에 대해 의논하신 것을 알지 못하고 베드로는 엉뚱한 제안을 내어 순종하라는 음성을 듣게 되었다(막 9:8). 베드로는 세족하시는 예수의 교훈을 깨닫지 못하는 언행을 했다. 부활전의 제자들의 모습은 신앙의 공동체가 아닌 것으로 복음서 저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2) 부활후의 제자들의 모임이 교회인가? 부활후의 제자들의 모임이 교회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칼 바르트(Karl Barth)와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아돌프 쉴라터(Adolf Schlatter)와 취코프스키(F. G. Cwiekowski)이다. 교회는 부활사건에 의하여 시작된 역사적 사건이며,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종말론적 사명으로 인해 정의되고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부활후의 제자들의 모임도 누가의 여덟가지의 교회관에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부활후의 제자들의 모임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첫째, 부활후의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했다. 제자들 중 몇몇은 예수의 부활을 의심했다고 마태복음은 말하고 있으며(마 28:17), 마가복음은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의 증인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들의 불신앙과 마음의 완악함을 꾸짖었다고 증언한다(막 16:14). 누가복음에는 예수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의 증거를 믿지 않은 것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셨으며(눅 24:11, 25), 그리고 열한제자들의 부활에 대한 의심을 지적하셨다(눅 24:38).
둘째, 부활후의 제자들간에 경쟁심이 남아 있었다. 요한복음에서는 부활후에 베드로는 제자들을 데리고 고기잡으러 가고, 흩어진 제자들도 있었다. 바닷가에서 예수께서 만들어 주신 음식을 먹은 후 좋은 분위기에서 베드로를 불러 간곡하게 사명을 부탁했을 때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전히 제자들간의 경쟁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요 21:21).
셋째, 부활후의 제자들은 영적인 깨달음이 부족했다.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모든 성경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눅 24: 7-11, 25-27).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셨다(눅 24:27). 그 후에 열한제자에게 나타나사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모세의 율법과 선지서와 시편을 설명하면서 그들을 깨닫게 하셨다(눅 24:44-45).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회복, 메시야 왕국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했다(행 1:6).
부활전의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에 관한 말씀을 믿지 않고 거부하였으며, 부활후의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믿지 않았다. 부활전보다 부활후에 제자들은 확신을 얻고 고무되었지만 아직 교회공동체의 모습은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승천후의 제자들은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말씀을 여러 곳에 전파하였고 또한 표적이 나타나게 되었다(막 16:20). 그리고 제자들은 기뻐하고 성전에서 하나님께 찬양했다(눅 24:52-53). 이렇게 된 것은 승천하기 직전에 성령받아 능력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들은 후에 힘을 얻게 된 것이다(행 1:8).
부활후는 승천과 오순절날을 다 포함한다. 획기적인 사건인 승천, 그리고 오순절날사건이 구분되어 있는데 부활후라는 말로 승천과 오순절을 포함시키려고 하는 것은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이것은 누가의 신학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누가는 오순절날 사건을 그의 신학의 이정표로 삼고 있다. 즉 누가는 오순절날 전후를 기준으로 삼아 그의 신학을 논하고 있다. 누가는 오순절날 전후로 구분하여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썼다. 누가는 교회가 부활사건에 의해 시작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순절날에 일어난 사건으로 교회가 세워졌다고 말하며, 열두제자들의 모습이 오순절날에 구별되게 다르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오순절날에 성령충만 받은 후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을 분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 그들은 성령충만 받은 후 다른 방언을 말하여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다(행 2:4). 그 전에는 이런 일이 전혀 없었다. (2) 그들은 성령충만 받은 후 담대히 말씀을 전했다(행 4:4). 그 전에는 이렇게 하지 못했다. (3) 그들 중 몇몇은 성령충만 받은 후 병든 자들을 고쳤다(행 4:28). 예전보다 치유의 능력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4) 그들 중 몇몇은 표적과 기사를 일으켰다(행 4:30). 예전보다 현저하게 나타났다. (5) 그들은 죽음의 위협에 두려워하지 않고 사명을 감당했다(행 12:1-2). 그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사명을 담당할 때 비로서 인정되고 존재된다는 위의 학자들의 주장은 옳다. 마가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은 거절하였고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 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이 사명을 거절하였으므로 대신 교회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막 12:1-9). 수많은 이방인들이 동서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마 8:11-12). 어떻게 이방인들의 구원이 성취되는지는 복음전파에 달려있다. 교회의 사명은 복음전파하는 것이다. 종말이 오기 전에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해야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종말론적인 사명이다. 이 사명을 열두제자들이 과연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사복음서의 저자들은 부활후의 열두제자들이 감당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만장일치로 동의한다. 그렇지만 누가는 오순절후의 열두제자들이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고 한다. 종말론적 신앙생활은 성령충만해야 가능하며 교회의 종말론적 사명은 성령충만한 교회가 감당할 수 있다. 성령의 임재는 종말론적인 사명을 촉구하는 것이다.
(3) 제자들의 공동체가 교회인가? 몇몇 학자들은 제자들의 공동체, 즉 마가의 공동체, 요한의공동체가 교회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복음서 저자들이 사용한 이미지안에 교회의 본질과 역할이 포함되어있다는 것이다. 어니스트 베스트(Ernest Best)는 다섯 가지 이미지 즉, ‘양떼’, ‘성전’, ‘배(boat)’, ‘지식의 공동체’, 그리고 ‘집과 가족’을 통해 마가의 공동체를 교회로 해석하고 있다. 김동수는 ‘목자와 양’, ‘포도나무와 가지’, ‘제자들의 공동체’, ‘성령의 공동체의 모임’이란 용어에 교회론적 이미지와 표현이 들어있다고 주장하여 제자들의 공동체가 교회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이미지적 해석은 예표론적 해석방법으로 확실한 성서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사용하는 방법이다. 교회론적 이미지나 표현이 있다고 하여 교회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다. 마가복음이나 요한복음에는 신약의 다른 책에서 볼 수 있는 교회공동체를 나타내는 언어를 찾아 볼 수 없다. 하워드 마샬(I. Howard Marshall)은 제자들의 모임과 교회는 동일한 실체라고 말하지만 시기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조지 라드(George E. Ladd)는 오순절전의 제자들은 교회 자체는 아직 아니며, ‘태아교회’로 간주하자고 말한다.
제자들의 공동체에서 교회의 기본적인 요소가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태아의 모습에서 태어날 아기의 기본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문제의 해결은 어떤 미래적인 요소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태아는 더 성장한 후에 출생해야 아기가 되는 것이며, 제자들의 공동체는 성령이 임재해야 교회로 발전하는 것이다. 김동수가 성령의 공동체의 모임을 교회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의 문맥상으로 볼 때 시기상조이다. 요한복음의 보혜사와 제자들과의 관계는 아직 미래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논쟁의 여지가 많은 20장22절의 성령수여는 실질적으로 제자들에게 임했는지 문맥상으로 볼 때 해석하기 어렵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가 떠나야 성령이 오신다고 했으므로(요 16:7), 요한의 공동체는 오순절날전의 모임이다.
(4) 마태의 공동체는 교회인가? 마태교회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사복음서 중에서 오직 마태복음에서만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하여 마태교회론에 대해 큰 기대를 갖고 있다(마 16:18; 18:17). 그러나 리차드 프란스(R. T. France)는 주장하기를 마태는 발달된 교회의 조직을 알았다거나 혹은 마음속으로 상상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했다. 마태복음에서 나타난 교회용어는 다른 복음서에서 볼 수 없는 교회의 본질을 위해 사용된 용어이지만, 사실 경험적으로 제한되어 있고 진정한 교회론으로서는 빈약한 기초만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하워드 마샬(I. Howard Marshall)은 "[교회의 설립에 관하여] 미래시제가 사용된 것은 교회가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열두제자들의 지도하에서 세워질 때까지는 설립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열두제자들의 지도하에 교회가 세워질 것이라는 뜻이다.
마태복음서나 다른 복음서에서 실질적으로 제자들의 공동체가 나오지 않는다. 예수의 메시지에 응답하여 스스로 자신의 고향마을에서 그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듣지 못한다. 예수의 메시지에 응답한 그들의 삶의 방식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들은 유대교와 그 관습을 따라서 계속해서 살아갔다고 보이지만(마 5:23-24 참고), 이 점에 대하여 복음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복음서 기자들이 시대착오적으로 교회의 삶을 부활사건전의 시기로 투영했다는 학자들의 주장은 옳지 않다.
(5)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부활전의 열두제자들, 부활후의 제자들, 그리고 제자들의 공동체는 아직 교회로서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였지만 교회의 기본적인 요소가 내포되어있다. 그러나 제자들만의 모임이나 공동체생활은 진정한 교회의 의미를 주지 못한다. 김은철은 부활전후의 제자들, 그리고 소위 마가의 공동체, 마태의 공동체 그리고 요한의 공동체를 "오순절날전의 제자들의 모임"이라고 단정한다. "오순절날전"이라는 말은 시간적인 의미로 뿐 아니라 사건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시간적인 의미로써의 오순절날전은 아직 오순절날이 이르지 않아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는 말이며, 사건적인 의미로써의 오순절날전은 이미 성령이 오셨는데도 개인적인 체험을 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누가는 오순절날전의 열두제자들과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제자들"이라고 명명하고 오순절날과 이후의 열두제자들과 예수를 믿는 자들을 "교회"라고 구분하여 부른다. 그의 복음서에서 그는 교회라는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두 번째 책에서는 오순절후에 교회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였다. 그러나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근본적인 신학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인 신자들을 "제자들"이라고 지칭하였다. 왜냐하면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이 교회 안에서 상호관계에 대한 일은 매우 민감했기 때문에, 제자들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오순절전의 예수의 제자들과 오순절후의 신자들간에 기본적인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원은 메시야를 영접하는데 있다. 이방인들은 메시야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지체들이 되고, 할례받은 유대인들과 함께 구성되는 새로운 상황이 생겨난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어휘상으로나 실천적인 상황으로나 대처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주도적인 인물들은 제자라는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열두제자들을 "사도"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일반 제자들과 구분하였으며, "사도들과 제자들"이라는 복합명칭을 사용하다가 그 후에 "사도들과 형제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형제들", "믿는자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여러 명칭을 사용했다. 하지만 누가는 복음전도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제자를 삼다"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바울서신에서 제자라는 단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은 것은 교회안에서 형제들이라는 말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사복음서에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제자들라고만 명시하고 있으며 오순절에 교회가 설립된 이후에 제자라는 말을 상황적 진행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사용하다가 그 후 교회안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4. 신약의 최초의 교회: 오순절교회
오순절날에 세워진 교회는 신약의 최초의 교회이다. 그럼 오순절날에 세워진 교회를 오순절교회라고 명명할 수 있는가? 이 답을 오순절날의 의미에서 찾아본다. 오순절날은 칠칠절 혹은 맥추절의 신약적인 명칭이며, 보리추수를 감사하여 첫 열매를 드리는 날이다. 오순절날을 영적으로 해석하면 곡식을 추수하는 것 같이 영혼을 추수하는 날이다. 이 날에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열두제자들이 복음을 외쳤고 베드로의 설교로 삼천명의 개종자가 생겼다. 오순절날에 첫 추수꾼이 된 성령받은 일백이십명의 제자들과 첫 열매인 삼천명의 개종자들과 함께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오순절날에 교회가 세워졌으니 오순절교회이다.
하지만 여러 학자들은 오순절날에 세워진 교회를 예루살렘교회라고 말한다. 장소가 예루살렘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는 예루살렘안에 오순절교회와예루살렘교회라는 두 개의 교회가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첫째, 누가는 복음의 주체와 대상이라는 두 개념으로써 두 교회로 구분한다. 1장8절에서 복음의 주체는 성령의 능력있는 증인들이며, 복음의 대상은 복음이 전파될 지역들이다. 즉, 성령의 능력있는 증인들은 오순절교회에 해당이 되며, 예루살렘,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전 세계는 앞으로 교회가 세워질 많은 지역적인 모임를 의미한다. 이 지역중에 예루살렘은 예루살렘교회를 의미한다.
둘째, 누가는 성령의 임재가 교회설립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두 교회로 구분한다. 오순절날에 성령이 임하셔서 교회가 세워졌으며(행 2:1-4), 예루살렘에 성령이 임하신 후에 교회가 세워졌다(행 4:31). 사마리아에도 성령이 임하신 후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고넬료의 집에 성령이 임하신 후에 교회가 세워졌다(행 10:1, 44-46; 12:15). 성령이 임하실 때마다 교회가 세워졌다. 성령이 예루살렘에 두 번 임하셨으므로 두 교회가 예루살렘에 있다는 뜻이다. 첫 번째 교회는 오순절교회이며 두번째 교회는 예루살렘교회이다.
셋째, 누가는 문맥적으로 두 교회로 구분했다. 2장은 오순절교회의 설립이고, 3장부터 예루살렘의 전도를 기록한다. 그 결과 4장4절에는 남자의 수가 5천명이 되었다고 말하며, 5장14절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큰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8장1절에 예루살렘교회라고 언급했다. 그렇지만 3장이후의 예루살렘의 복음전도는 오순절교회의 활동이기 때문에 두번 째 성령의 임재전까지로 구분한다면 2장1절부터 4장22절까지는 오순절교회의 설립과 활동에 관한 기록이다. 그리고 예루살렘교회의 설립과 활동은4장23절부터 8장3절까지이다.
넷째, 누가는 장소를 구분함으로 두 교회로 구분했다. 전자는 일백이십명이 공동체생활할 수 있는 어느 공간에서 이루졌음을 말한다(행 1:16). 그리고 오순절날에 삼천명의 개종자들이 교제하고 기도하고 가르침을 받은 어느 공간이 있음을 말한다(행 2:42). 후자는 예루살렘성전의 솔로몬행각이다. 오천명의 남자들이 예수를 믿었다. 큰 무리의 믿는 자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다. 백성들이 모여있는 장소이며, 수 많은 병든 자들이 모여 기도받은 장소이다(행 4:4; 5:12-16).
다섯째, 누가는 다른 설립시기를 통해 두 교회로 구분했다. 오순절날에 세워진 교회가 있으며(행2:1), 다른 어느날에 세워진 예루살렘교회가 있다(행 4:31).
여섯째, 두 교회의 모습을 비교하여 구분해 본다. 오순절교회의 모습은 (1) 기도, (2) 성령의 임재, (3) 성령충만, (4) 말씀증거, (5) 세례와 개종, (6) 가르침, (7) 교제, (8) 기사와 표적 (9) 공동체생활 등이 있다. 예루살렘교회의 모습은 (1) 기도, (2) 병고침, (3) 세례와 개종, (4) 성령강림, (5) 성령충만, (6) 말씀증거, (7) 교제, (8) 공동체생활, (9) 표적과 기사, (10) 가르침, (11) 구제, (12) 순교 등이 있다. 여기에서 비교해 보면 예루살렘교회는 병고침, 구제, 순교의 세 가지 요소가 더 있다. 병고침은 기사와 능력의 요소에 포괄적으로 포함되며, 구제와 순교는 교회가 상황에 적응하여 나타난 새로운 모습이다.
일곱째, 두 교회의 구성원들이 다르다. 전자는 열두사도와 예수의 가족, 그리고 여자들 모두 일백이십명과 첫 날에 개종한 삼천명으로 구성되었고, 후자는 사도들과 일곱 일꾼과 그리고 많은 수의 믿는자들로 구성된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성령의 역사로 위의 두 교회를 세웠으며, 사마리아교회, 갈릴리교회, 유대교회, 그리고 가이사랴교회도 세웠다. 사도들은 여러지역을 다니며 복음전도하여 교회를 세웠다. 사도들은 어느 특정한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루살렘교회를 중심으로 모여 기도하고 교제했으며 국내외 선교하는 일을 했다.
위의 일곱가지 요소가 두 교회로 구분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만일 1장13절의 다락방이 있는 집이 12장12절의 마리아의 집과 동일한 장소라면, 두 교회가 아니라 한 교회이며 그 교회는 예루살렘교회이다. 그러나 하워드 마샬은 두 장소가 동일한 장소라는 긍정적인 증거가 없다고 말한다. 위의 두 집이 각각 다른 장소에 있었다면 베드로는 두 교회를 왕래한 것이다. 하지만 두 교회의 공통점은 성령충만한 교회이며, 둘 다 오순절교회이다. 왜냐하면 둘 다 성령이 임재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5. 오순절교회의 정체성
오순절날에 일어난 사건은 신약의 최초의 교회의 설립이며, 신약의 최초의 교회는 오순절교회임을 입증했다. 이제 오순절교회는 어떤 교회인지를 알아보자. 누가는 이에 관하여 네 가지 사실을 확실하게 말한다.
첫째, 오순절교회는 성령충만한 교회이다. 교회는 성령의 임재가 있어야 하고 그래서 성령충만한 교회가 된다. 오순절교회는 최초의 교회이므로 교회의 모든 것에 기본과 모본이 된다. 성령충만한 교회는 교회의 본질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모든 교회는 성령충만한 교회이며 성령충만을 강조하는 교회이다.
둘째, 오순절교회는 오순절교회를 설립한다. 다시 말하면 오순절교회는 오순절교회를 낳는다. 오순절교회는 오순절교회인 예루살렘교회를 낳았고, 예루살렘교회는 안디옥오순절교회를 낳았다.안디옥교회는 각 교회(행14:23: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비시디아 안디옥) 그리고 여러 교회(행 16:5: 베니게, 사마리아, 수리아, 길리기아, 갈라디아, 브르기아,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에베소, 마게도니아 등)를 낳았다. 이 교회들은 모두 다 오순절교회이다.
셋째, 오순절교회는 교회설립하는 교회이다. 오순절교회의 특징은 교회개척을 잘하고 크게 성장시킨다. 오순절교회는 예루살렘교회를 설립했고, 예루살렘교회는 사마리아교회, 유대교회, 갈릴리교회를 설립했고, 안다옥교회를 설립했다. 안디옥교회는 각 교회(행 14:23: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비시디아 안디옥) 그리고 여러 교회(행 16:5: 베니게, 사마리아, 수리아, 길리기아, 갈라디아, 브르기아,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에베소, 마게도니아 등)를 설립했다.
넷째, 오순절교회는 국내외 선교하는 교회이다. 오순절날 한 날에 국내외 선교 둘다 했다. 제자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하므로 16개국에서 온 사람들은 성령의 메시지를 들었으며,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교회를 세웠다.로마교회는 오순절날에 변화된 사람들로 하여금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베드로가 그 날 하루 설교함으로 3천명의 개종자들이 생기게 되었으며, 이 사람들은 국내외 교회의 회중이 되었다. 예루살렘교회는 국내선교로 사마리아교회, 유대교회와 갈릴리교회를 세웠으며, 해외선교로 안디옥교회를 세웠다. 안디옥교회도 국내외 선교하였다. 각 교회(행14:23: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비시디아 안디옥) 그리고 여러 교회(행 16:5: 베니게, 사마리아, 수리아, 길리기아, 갈라디아, 브르기아,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에베소, 마게도니아 등)를 세웠다.
결언
여기에서 지금까지 논의해 온 것을 요약하면서, 논제와 관련된 것을 현재의 문제에 적용하여 다루면서 결론을 내린다.
1. 누가가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이 단어의 원래의 의미와 같은 뜻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우리는세계공용어인 영어의 처취(church)와 한국어의 교회(敎會)란 말이 원래의 의미와 같게 사용되었는지 평가할 필요가 있다. 영어로 처취라는 말은 고대영어 취리췌(cirice)에서 온 것인데 이 단어의 유래는 독일어 키리카(kirika)이다. 그리고 키리카는 그리스어의 큐리아케(kuriake)에서 나온 말로써 ‘주님의’(Lord’s)란 뜻으로 "주님의 교회"(ekklesia kuriake)의 단축어로 인식한다. 그래서 처취는 원어의 의미와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어의 교회는 원어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 처럼 인식하여 사용되고 있지만, "가르치는 모임"(敎會)은 원래의 의미와 같지 않다. 초기에선교사들이나 성직자들이 성경을 가르치고 성도들은 배우는 일을 주로 하니까 이 한자어를 사용하였는지 모른다. 일전에 토레이 신부(R. A. Torrey)는 "사귀는 모임"(交會)으로 고쳐부를 것을 제안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성도들의 교제가 있는 모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지만 교회는 성경공부, 교제 외에 예배, 기도, 전도 등을 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이기 때문에 이 모임을 적절하게 표현하기 위해 포괄적인 함축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대체할 단어는 "거룩한 모임"(聖會)이다. 거룩한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거룩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 그리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함께 모이는 모임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성회"를의미한다. 이 말은 원어인 "야웨의 총회"와 같으며 누가의 "하나님의 총회"(Assembly of God)와도 같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교회"(敎會) 혹은 "교회"(交會)라는 단어보다 "성회"(聖會)라는 단어가 더 적합할 것이다.
2. 누가의 교회관을 요약하여 보면, 교회는 성령충만한 교회를 말하며, 성령충만한 교회는 복음증거하여지역교회, 지방교회를 설립하고 나아가서 해외에서도 수많은 교회를 설립한다. 또한 선교하기 위한 선교대회를 열어 선교사를 파송하기도 하며 선교전략을 모색하기도 한다. 예루살렘교회는 복음전도로 인해 교회부흥은 이루었을 때에 핍박을 받게 되었고 기도에 힘써서 기적을 체험하기도 했다. 많은 교회가 설립된 것을 하나의 유기체로 표현하여 교회의 단일성을 나타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므로 모든 교회는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1) 누가의 교회관은 다양하지만 교회의 본질을 보여준다. (2) 누가의 교회관은 다양하지만 교회의 단일성, 유기체성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누가의 교회관은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당면한 중요한 문제를 지적한다. 매우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교회의 다양성과 단일성에 관한 것인데, 다양성은 단일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린도교회는 분열직전의 상황에서 바울이 수습했지만, 한국교회는 분열되고 또 분열되고 또 분열되었다. 예수교회와 그리스도교회가 서로 대립하고 예수그리스도교회와 그리스도예수교회가 서로 대립한다. 교회는하나님의 교회이다. 모든 교회는 하나님께 속한다. 그러나 어떤 교회는 교파에 속하고 교리에 속하고 정치에 속한다.
3. 누가는 오순절교회가 최초의 교회이며 원시오순절교회(proto-Pentecost)임을 천명한다. 오래전에 찰스 탈버트(Charles H Talbert)는 초기 누가의 교회관의 관심은 원시개신교(proto-Protestant)라고 하였다. 이렇게 주장하게 된 배경은 리츨(A Ritschl)의 가톨릭교회의 기원에 관한 견해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리츨은바우르(F. C. Baur)의 견해, 즉 가톨릭교회는 유대적 그리스도교와 이방인 그리스도교와의 갈등 가운데서 화해의 역할을 담당하려고 설립한 것이라는 견해를 반박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를 가톨릭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교의 한 단계라고 단정했다. 차라리 바우르의 견해가 성서적이다. 왜냐하면 화해는 바울의 신학 중 한 부분을 차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의 화해신학은 역사적으로 거의 존재하지 않고 있으며, 그와 정반대의 일들로 가득차 있다. 리츨의 견해는 가톨릭교회의 기원에 관한 권위적인 해석으로 사용되지만 성서적 근거가 없다. 가톨릭교회가 이방인 그리스도교의 한 단계라고 주장한 의도는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에 포함되어 있는 교회 중에 속하려고 한 것이다. 즉, 가톨릭교회의 정체성을 성서적 뿌리에 두려고 시도한 것이다. 순교한 베드로를 로마의 주교로 추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시도한 것이다. 오랜세월의 동면에 있던 교회가 바울의 신학으로 인해 개신교로 새롭게 나타나게 되었다. 오직믿음(Sola Fide), 오직은혜(Sola Gracia), 오직성경(Sola Scriptura)의 신학으로 교회개혁을 이루었다. 그리고 교회의 부흥을 일으켰다. 개신교는 초기단계에 바울의 신학을 토대로 세워졌다. 하지만 바울보다 시대적으로 앞선 누가의 신학으로 오순절교회를 재조명해야 한다. 누가의 교회관의 관심은 원시오순절교회(proto-Pentecost)이다. 즉, 모든 교회는 오순절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오순절교회인 하나님의성회(Assemlies of God)는 오순절날에 세워진 교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왜냐하면 오순절날에 세워진 교회가 성령충만하기를 애쓰고 전도와 선교하기를 애썼던 것 처럼, 하나님의성회도 성령충만하기를 애쓰고 전도와 선교하기를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4. 오순절의 일회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종종 나타난다. 누가의 사도행전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의 의견에 변화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오순절의 일회성이란 말이 오순절날에 일어난 사건은 역사적으로 한번 밖에 없었다라고 하는 의미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의 함축된 뜻이 오순절날에 성령의 임재는 한번 뿐이었다는 의미라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왜냐하면 오순절날이라는 날에 한정한다면 맞지만 성령의 임재가 일회만이라면 틀리기 때문이다. 성령의 강림이 한번 더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임하셨기 때문이다. 두 번 확실하게 위에서부터 성령이 임하셨다. 그리고 또 고넬료의 가정에서 성령의 임재가 있었다(행 10:44). 베드로가 11장15절에서 오순절날의 사건을 "처음"이라고 언급한 이유는 고넬료가정의 사건이 오순절날의 사건과 동일한 사건이라는 뜻이다. 그 후에도 사도들과 제자들 혹은 성령충만한 사람들을 통하여 성령이 동일한 사건으로 임하셨다. 학자들은 사도행전에 유대인 오순절, 사마리아 오순절, 이방인 오순절이 있다고 말한다. 20세기초에 성령충만한 사람들로 하여금 부흥이 일어났다. 토페카 부흥, 아주사거리 부흥, 시카고 부흥이 일어났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미국 전역, 유럽, 남미, 그리고아시아에 퍼지게 되었다. 그래서오순절교회가 전 세계에 세워지게 된 것이다. 오순절교회는 1세기초에 세워졌던 교회이며 20세기 초에 다시 세워진 교회이다. 누가의 신학을 토대로 하여 20세기와 그 후세기를 오순절교회시대로 만들어야 한다. 오순절의 성령운동을 계속 전개해 나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