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국 소식
하나님의성회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윌리암 멘지스 박사 저
김은철 박사 역
하나님의성회는 알칸사스 주(Arkansas) 핫 스프링즈(Hot Springs)에서 1914년 4월6일부터 10일까지 열린 제1회 총회에서 태어났다. 알칸사스 주(Arkansas) 말번(Malvern)에서 이. 엔. 벨(E. N. Bell) 이 1913년 12월20일 일자로 편집하여 발행한 정기간행물 “말씀과 증거” (The Word and Witness) 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오순절 성도들과 하나님의 교회들의 총회”를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단체를 결성하려는 문제에 대하여 오순절 신자들 사이에 뜨거워진 논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많은 지역에서 그리고 여러 다른 나라에서 대표자들이 핫 스프링즈 총회에 몰려 왔다. 이러한 역사적 모임에 300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참석했는데 이들 중 128명은 공식적으로 등록했다. 20세기초 오순절운동의 많은 위대한 지도자들이 명단에 기재되었다. 이 총회에서 오순절교회들의 자발적이고 협력적인 모임을 결성하여 하나님의성회 총회로 부르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1914년의 핫 스프링즈 모임은 오순절 신자들을 한데 모으려는 첫 시도는 아니였다. 1905년과 1913년 사이에 다양한 캠프모임과 집회가 주로 미국 중남부에서 15번이나 있었는데 1913년 여름까지 광고하면서 열린 집회였다. 어떤 지역에서는 연합이 활발했다. 디.시.오. 오퍼멘(D. C. O. Opperman) 같은 존경받는 리더들은 젊은 설교자들을 훈련하기 위해 단기 성경학교들을 운영했다. 1901년과 1914년의 핫 스프링즈 모임 사이에 정기간행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정기간행물들은 막 생겨난 부흥운동에 목적의 일치감을 주는데 도움이 되었고 좀 더 공식적인 단체로 만들어 나가는 방향을 가르켜 주었다. 무엇이 이러한 초기 독립적 오순절교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조직으로 결성하기 위해 연합하도록 했는가? 적어도 네 가지 이유가 있다.
교제 (Fellowship)
이 시점에 앞서서 오순절 부흥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오순절 체험에 대한 최초의 신학적 정체성 - 즉 새로운 탄생(중생) 이후에 오는,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성경적인 증거가 수반되는 성령세례에 대한 믿음 - 이 주어진 것은 바로 1901년 칸사스 주(Kansas) 토페가(Topeka)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성령세례가 “증거를 위한 능력부여”라는 가르침은 1890년대까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가르쳐진 것이었다. 오순절 교인들은 방언이나 신약에 기록된 성령의 나타나심의 다른 표현들이 오늘날에도 체험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이해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커다란 논쟁의 원인이 되었다. 오순절 교인들은 사실상 다른 신자들로부터 교제가 끓어졌다. 그들은 공동의 믿음을 나누는 새로운 교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훈계 (Discipline)
많은 오순절 신자들이 강한 지도자들을 끌어들이고 싶어하는 경향으로 다소의 오순절 교인들사이에서 불화를 일으키고 논쟁을 좋아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좀 더 성숙한 지도자들은 명사중심으로 모이는 충성심이 분파적 결과를 만드는 것에 대해 불편해 했다. 몇몇의 지방회 지도자들은 다양한 악폐에 대해 죄의식을 가졌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심각하게 여겼다. 만일 책임 있는 교회들이 좋은 평판을 유지하여야 한다면 리더십을 훈련하는 방안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되었다. 행위와 실천의 도덕적 규범이 필요하게 되었다.
교리 (Doctrine)
교리의 일치에 대한 인지적 욕구가 있었다. 많은 초기 오순절 설교자들은 훈련을 받지 못해서 하나님의 양떼를 양육하는데 적절한 성서적 기초가 부족했다. 열정은 반드시 지혜와 일치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개인적 체험으로 그의 가르침을 좌지우지했다. 이것은 종종 분열과 혼동을 일으키게 한 모순된 가르침들의 잡동사니를 만들었다. 정확한 교리진술이 창립 총회시에는 형성되지 않았지만 1916년까지 계속된 교리논쟁은 “근본진리의 진술”의 필요성을 촉진시켰으며, 이 교리진술은 하나님의성회의 가르침의 핵심으로 편입되었다.
선교(Missions)
오순절 부흥의 초기시대부터 다양한 집회모임에 있었던 공통된 의식은 국내외적으로 잃어버린 영혼에게 다가가려는 반응이었다. 해외선교와 국내개척목회는 초기 오순절교인들 사이에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였다. 개교회들은 해외선교를 잘하지 못했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해외사역과 서로 관련시키는 필요성, 선교지에 후원금을 전달하는 장치의 필요성, 해외정부와의 법적 대표권, 해외에서 선교재산소유권의 승인의 필요성, 이 모든 것은 좀 더 중앙집권화된 선교사업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외로운 선교지의 고립된 상황에서 자포자기한 선교사들의 이야기는 위기감을 돋구었다. 선교사들을 보내고 후원하도록 좀 더 결합력 있는 전략을 정립하려는 욕구는 분명히 오순절 교인들이 협력적인 단체를 구성하려는 그들의 독립적 방법을 밝히는 주요한 이유 중에 하나였다. 처음부터 하나님의성회는 세계복음화에 강한 헌신을 해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