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국 소식
사도행전의 신자들의 수와 교회의 수
신학국장 김은철 목사
사도행전의 신자들의 수와 교회의 수는 얼마나 될까? 이것은 매우 궁금하고 재미있는 주제가 될 것이다. 먼저 1세기 하반기의 팔레스틴의 인구를 살펴본다면, 여러 학자들은 예루살렘의 인구를 약 7만으로, 그리고 그 밖의 지역 즉, 온 유대, 갈릴리, 사마리아를 모두 합하여 30만으로 추산한다.
1. 예루살렘
예루살렘의 어느 한 집 다락방에 모인 120명(1:15)과 오순절날에 믿는 신자들의 수 3천명(2:41)을 더하고, 솔로몬 행각에 모인 남자의 수 5천명(4:4)을 더하면 8천1백20명이 된다. 그 후에 믿는 남녀의 수가 큰 무리가 되었다고 하며(5:14), 여자 제자들의 수가 증가했다고 말한다(6:1). 이 후 교회의 핍박 때문에 사도 외에 모든 사람들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피신했지만(8:1), 핍박이 사라지고 평안하게 되어 흩어졌던 제자들이 대부분 돌아오고 복음전도로 인해 신자들이 증가하였다. 그럼 이 때(AD 58) 예루살렘에 있는 신자들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야고보는 수만명이라고 말한다(21:20). 그렇다면 예루살렘에 있는 신자들의 수는 적게 추산해도 2, 3만명이 될 것이다. 신자들은 유대 교권자들의 감시를 받고 있으므로 더 이상 3천명 혹은 5천명이 모일 수 있는 솔로몬 행각이나 공공장소를 사용할 수 없었으며, 또한 정치적 박해로 공공연한 종교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회적 질서에 위배되지 않은 범위내에서 조용히 전도하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초대교회는 가정교회였기 때문에, 한 집에 5백명을 수용한다면 40에서 60개의 교회가, 한 집에 1백명을 수용한다면 2백개에서 3백개의 교회가 예루살렘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숫자적인 개념으로 나타낸 것이다. 사도들은 교회들을 돌보는 순회목회자 혹은 설교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으며, 제자들은 신앙공동체의 생활을 하며 지역교회를 유지했다. 예루살렘 총회(AD 59) 이후 사도들은 각자의 선교를 위해 예루살렘을 떠난 것으로 보이며, 야고보와 장로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들을 돌보았다.
2.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울의 핍박(AD 32)으로 인해 사도 외에 예루살렘에 있던 신자 8천여명과 많은 제자들이 빠져나가 두 지역(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복음전도가 크게 이루어졌다(8:1-4). (1) 예루살렘 부근의 지역(온 유대)에서 수많은 병든 자들이 솔로몬 행각에 와서 사도들에 의해 모두 고침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5:16). 5천명이 솔로몬 행각에 모여 말씀 듣다가 믿은 경우를 참고해보면(4:4), 온 유대에서 온 사람들은 5천 정도가 될 것이라고 추정된다. 베드로는 룻다, 사론, 욥바 등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했다(9:32-35). (2) 사마리아 전도에 대해서는, 빌립 전도자를 통해 사마리아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고침을 받았고 세례를 받았다(8:4-13). 그 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했다(8:25). (3) 갈릴리 전도에 대해서는, 예루살렘으로 내려온 120명은 자신들의 고향 갈릴리로 올라가 복음을 증거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갈릴리 출신이므로 갈릴리 지역의 복음화에 힘썼을 것이다. 또한 베드로는 북갈릴리,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인 백부장 고넬료 가정에서 그 집안의 식구들을 개종시켰다(10:44-48). 베드로와 사도들 그리고 제자들이 30년간(AD 30-59) 예루살렘 지역을 전도한 결과 인구의 약 30퍼센트인 2, 3만명 얻게 되었으며, 그 밖의 팔레스틴 지역에서 이 비율로 신자를 얻었다면 약 7만명이 되므로, 팔레스틴 인구 30만명중에 10만명이 신자로 추산된다.
3. 안디옥
예루살렘 교회의 제자들이 안디옥에 와서 전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어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이 소문에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냈으며(11:19-22), 바나바의 전도 결과로 크게 부흥하게 되었다(11:24). 요셉푸스(Josephus, 37-100)에 의하면 안디옥 인구 50만명 중에 10만명이 신자가 되었다고 하므로, 안디옥 인구의 20퍼센트가 기독교인으로 개종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1천명이 기거할 수 있는 큰 저택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5백명 혹은 3백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저택들이 많이 있었다. 안디옥에서 뿐 만 아니라 빌립보, 고린도, 로마 등지에 유복한 유대인 상인들이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들 중 상당한 수가 개종되어 그들의 집을 예배와 교제의 장소로 제공하였다.
4. 사도행전의 신자들의 수
그럼 AD 65년에는 신자들이 얼마나 될까? AD 65년은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한 시기로 여기기 때문에 이 때까지를 그들의 복음전도 시기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며, 또한 사도행전의 끝이 바울의 순교 직전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바렛(David Barrett)이 편집한 세계기독교백과사전에서 AD 100년의 기독교 신자들의 수를 1백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AD 100년의 신자들이 1백만명으로 추산되기 때문에, AD 65년의 신자들의 수를 80만명이라고 추산한다면 넉넉히 계산한 것이다.
5. 베드로의 회중과 바울의 회중
사도행전의 신자들의 수 80만에서 팔레스틴의 신자들의 수 10만을 빼면 70만이 된다. 그렇다면 70만명의 신자들은 바울의 회중인가?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바울의 선교에 역점을 두고 강조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에 모든 공로를 바울에게 돌린다. 사도행전 신학의 대가로 알려진 야콥 예르벨(Jacob Jervell)은 “누가에 있어서 교회의 95%는 바울의 교회이다. 즉 바울은 회중의 95%의 창립자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어떠한 근거로 주장하는지 자료를 제공하지 않는다. 서구 신학자들의 바울 위주로 보는 성향으로 하여금 베드로의 비중이 약화된다. 바울의 비중이 신약안에서 큰 것은 사실이지만, 사도행전안에서까지 영향을 미치게 함으로 누가의 견해를 왜곡시킨다.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를 재조명해보자.
(1) 누가는 베드로가 이방교회의 기초를 세운 최초의 사도라고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베드로는 오순절날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그 날 3천명이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2:14-41), 믿은 자들 중에 팔레스틴 유대인 뿐 아니라, 헬라 유대인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들은 절기 후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전도하고 교회를 세웠을 것이다. 이들은 로마제국에 흩어져 살다가 절기를 맞이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15개국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바대, 메대, 엘람, 메소포다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애굽, 리비야, 로마, 그레데, 아라비아에서 왔다. 이 가운데 로마교회는 베드로가 세운 교회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오순절날에 일어난 개종의 역사가 한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졌다. 매년 유대인들은 세 절기를 지키려 예루살렘에 모인다. 유월절에 가장 많이 모이는데 20만명 정도 되고, 오순절과 초막절에는 각각 10만명 정도가 모인다. 팔레스틴 유대인과 헬라 유대인을 포함하여 연간 40만명 정도 모이는 절기에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는 집중 전도대회를 했을 것이다. 이 예루살렘 전도대회는 적어도 30년(AD 30-59) 이상 계속 이어졌으며, 이 때 헬라 유대인들의 개종 숫자는 적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예루살렘 교회는 해외선교의 전초기지인 것이다.
(2) 누가는 베드로가 최초의 이방인의 선교사와 이방인의 사도로 부각시키고 있다. 베드로는 직접 이방인 선교에 참여했다.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 복음을 증거하고 또 하나의 오순절 체험을 할 수 있게 사용된 베드로는 가이샤라에서 이방선교를 처음 시도했다. 가이사랴 오순절교회에서 로마인을 향한 선교가 시작된 것이다. 또한 베드로는 안디옥 교회에 와서 목회하였으며(갈 2:11), 안디옥 교회의 감독으로 있었다가 여기에서 순교하고 묻혔다고 전해진다. 베드로전서 1장1절에 그의 서신의 수신자들이 본도, 갈라디아, 비두니아 및 갑바도기아 도시에 있는 신자들인 것을 볼 때 베드로는 여러 도시에 교회들을 세웠다는 것이 명백하다. 교회사가인 유세비우스(Eusebius, 263-339)의 문서에 의하면,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비두니아 및 갑바도기아 지방에서 선교하다가 로마에 와서 선교하고 신자들과 함께 있었다고 기록한다. 이 때 로마에는 2, 3개의 가정교회가 있었고, 신자들의 수도 상당히 많았다. 이 때 로마시민은 1백만명이었다. [콘스탄틴 대제가 AD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할 때 로마시민은 80만이었고, 로마에 사는 기독교인의 비율이 9퍼센트이라는 정설을 받아드린다면, 당시 로마에 있는 신자들의 수는 약 7만명이 된다.]
(3) 예루살렘, 유대, 갈릴리, 사마리아에 있는 교회들, 그리고 안디옥에 있는 교회들까지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베드로와 사도들과 제자들의 전도영역에 속한 것이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의 제자들이 세운 교회이며(11:19-21),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하였으며 그는 큰 부흥을 일으켰다(11:22-24). 바나바는 바울을 다소에서 데리고 와서 1년간 많은 신자들을 가르치게 하였으며(11:25-26), 그 후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되었다(13:1). 그러므로 안디옥 교회 이후의 다른 여러교회의 설립은 바울과 그의 동역자가 한 것이 분명하다.
(4) 제1차 전도여행은 바울이 주도한 것이라기 보다는 바나바가 주도했으며, 활동면에서 두 사람의 역할이 균등하게 나타난다(13:1-14:28). 엄격히 말하면, 바울의 선교사역은 제2차 선교여행 이 후부터 자립적으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이며, 바울을 선교사역으로 이끈 선배동역자이며 은인이기도 하다.
(5) 바울은 20년간(AD 46-65) 당시 로마제국 영토안에 넓은 지역의 많은 곳을 두루다니며, 제1차 전도여행(구브르 섬,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나움, 루스드라), 제2차 전도여행(수리아, 길리기아, 더베, 루스드라, 마게도니아,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레아, 아덴, 고린도), 그리고 제3차 전도여행(에베소, 마게도니아, 고린도)을 마치고 난 후 선교할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고, 그래서 로마의 신자들을 만나보고 싶어했다(롬 15:22). 그는 결국 로마에 갔지만 가택연금 상태에서 2년동안 여러 계층의 사람을 만나 복음을 전했다(행 28:30-31).
위의 근거로 평가해보면, 적어도 사도행전의 교회의 40퍼센트는 베드로의 교회이며, 나머지는 바울의 교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