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질문과 필요 없는 질문’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창 22:1∼4)
여러 가지 사물에 대하여 건전한 욕구에서 비롯되는 질문을 가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관계에서는 다릅니다. 어떤 사람을 깊이 알고 온전히 신뢰할 수 있게 되면 그 사람의 행동이나 요구에 대하여 더 이상 질문할 필요가 없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질문에 관련하여 우리는 상반되는 두 가지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하여 더 많이 알기 위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나라가 지도자들의 부패와 백성의 우상숭배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파멸하게 될 것을 경고하며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탄식했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외쳤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어릴 때부터 성경을 접하였고 성경에 능통했지만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와 구원의 진리에 대하여 바르게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기독교인들을 증오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깊이가 무궁무진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되면 인생관이 달라집니다. 우주관, 역사관, 생사관, 가치관이 변화됩니다. 사람이 가지는 질문 가운데 가장 귀중한 질문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땅에 엎드러져서 물었던 “주님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 일생 동안 “주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답을 얻기 위해 성경을 늘 묵상하고 상고해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대하여 질문할 필요가 없어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어찌하여’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시내산 위로 올라가서 여러 날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이 아론에게 요구하여 금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그 앞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먹고 마시며 뛰놀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민족으로 만들겠다.” 하셨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출 32:11∼13) 하며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여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말아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간구한 것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그런데 그가 사용한 ‘어찌하여’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연히 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노하시는 이유가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우상숭배를 한 이 백성에게 진노하시고 진멸하시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의 진정한 마음을 아셨기 때문에 ‘어찌하여’라는 말은 간과하시고 모세의 기도를 들으셔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탁월한 점은 하나님의 지시에 대하여 “왜”라고 묻지 아니하는 태도입니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청천벽력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지만 아브라함은 무조건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고 온전히 신뢰할 수 있게 되면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이나 요구에 대하여 질문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이런 경지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품성과 언약과 뜻을 더 많이 알기를 소원하여 성령께 질문하고 가르쳐주기를 구하십시오. 그리하여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깊이 알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명령에 대하여 어떠한 질문도 필요치 않고 소망과 기쁨으로 순종하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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